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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설교] 「담대한 복음전도」(행4장13-22절)
글쓴이 : ydkorea    날짜 : 2014-06-20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본문: 사도행전 4 : 13 ~22


명동과 같은 번화가를 걷다 보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장면을 목격하곤 합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글씨를 옷과 피켓에 새기고 큰 소리로 외치는 분들 때문입니다. 그분들을 볼 때마다 저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꼭 저렇게까지 전도해야 되나?’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 넌 전도를 열심히 하고 있니?’


영국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신학자이자 설교가인 존 스토트(John Stott)가 쓴 저서 중에 “전도하지 않는 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전도에 있어서 가장 큰 방해물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이라 일컫는 사람들의 침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복음이 주장하는 대로 기쁜 소식이며 우리를 확신시키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존 스토트의 말이 심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안타깝게도 존 스토트가 태어난 영국은 이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아니라 선교사가 필요한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윌리엄 케리와 허드슨 테일러를 비롯해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던 나라의 복음화율이 7%도 안됩니다. 왜요? 그리스도인들이 침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대교인들은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복음 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조롱과 핍박을 당해도 복음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자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을 잡아 가두고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8~19절 보세요.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쯤 되면 누구라도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만약 그때 사도들이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에 위축되어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여기에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우리의 가족은 물론 우리의 친지들과 이웃들, 아니 복음을 들어 구원받을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다고요? ‘담대하게’ 참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당시 모든 권력을 잡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들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베드로와 요한은 학문 없는 범인이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들은 그렇게 담대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에도 복음전파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종종 다투곤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4절은 그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그런데, 놀랍지 않습니까? 이랬던 사람들이 지금 생명을 걸고 복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안일함과 야망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복음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세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들은 알았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침묵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부모·형제가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데, 우리의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데 왜 우리는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요?


질문을 바꾸어 볼까요? 우리와 달리 어떻게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게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변화된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13~14절 보시죠.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이 말씀은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비난하고 싶은데 비난할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요? 종교지도자들이 생각해도 베드로와 요한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무식쟁이였고 소심하고 겁쟁이였던 그들이 변했습니다. 더욱이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은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변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난 분명한 변화를 부인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담대한 복음 전도는 변화된 삶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나오고 술과 담배를 끊는 정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변화된 것처럼 완전한 변화, 그들을 비난하려고 비난거리를 찾는 종교지도자들조차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화된 모습, 그 변화된 모습이 있을 때 우리는 어디서든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기독교에서의 변화는 우리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타 종교와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타 종교가 인간의 노력으로 자신을 선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길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역사로 변화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사람들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변화되었습니다.


본문에 소개된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자,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성경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인가요? 주일 성수를 열심히 하고 십일조를 하며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기 때문인가요? 아니요. 하나님이 그들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십일조를 하고 금식을 하며 종교생활을 열심히 했던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지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놀랍게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은 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하나님이 역사가 있었기에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기독교를 통제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여러분을 통제하고 여러분의 삶 전체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함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기독교인으로 만드심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거듭날 수 없습니다.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성령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처럼 교회 다닌 지는 오래 되었는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에 대해 마틴 로이드존스는 오늘날의 교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를 검토해 보고 설교와 토론을 들어본 후에야 최종적으로 기독교를 취하기로 결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자신들의 삶 대부분의 영역과 일상생활에서 기독교를 잊고 지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일요일이 되면 종교적인 관심에 집중해야 할 날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독교는 일요일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나머지 6일은 자신의 뜻대로 사는 종교가 아닙니다.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과 교제하다가 돌아가 나머지 요일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경고하며 절대로 복음을 전하지 말하고 협박할 때에도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듣고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찌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양화진에 가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순교한 선교사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가끔 그곳을 방문할 때면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그냥 전해진 것이 아님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은 24세 젊은 나이로 조선에 와서 불과 8개월 만에 순교한 루비 켄드릭(Ruby R. Kendrick, 1883~1908)이라는 여선교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루비 켄드릭은 미국 텍사스 남감리교회의 독실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1907년 9월에 남감리교회 여자외국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조선에 왔고, 개성에서 한국말을 배우면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만일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녀가 죽기 전 부모님께 보낸 한통의 편지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에 오기 전 집 뜰에 심었던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 종일 집 생각만 했습니다. 욕심쟁이 수지가 그 씨앗을 받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니 너무나 대견스럽군요. 아마 내년 봄이 되면 온통 우리 동네는 제가 심은 노란 꽃으로 덮여있겠군요.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km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 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지 일주일도 안되는 교인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도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순교를 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 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뜰에 심었던 한알의 씨앗으로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하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내겠지요.


저는 이곳에서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 아마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조선을 향하는 저의 열정이 아니라,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